Arida Nube Patagónica de Chubut, Argentina | 아르헨티나 추붓, '파타고니아스러운'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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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작가이자 여행가인 C.M. Doughty는 "마을 사람들은 거친 황무지의 악마인 양 베두Beduw를 두려워했다"며 "땅 위를 겅중겅중 달리는 베두"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아랍국가에 사는 정착민들은 오아시스 섬에서 사막의 위험과 더불어 사는 자신들을 에워싼 유목민들을 항상 부러움과 증오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정착민은 꿈틀거리는 야생의 자연에 사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싶어 했다. 그 적대감은 상호적이어서 사하라 사막에 사는 켈 타마세크(Kel Tamashek, 북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내륙에 사는 투아레그족이 스스로 부르는 이름)는 정착민들을 하리틴haritin이라 부르는데, '경작자'를 의미하는 이 단어에는 경멸의 뉘앙스가 숨어있다.
선도적인 환경보호주의자인 George Monbiot는 ≪No Man's Land≫에서 유랑민과 정착민 간의 갈등에 대해 쓰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인간 본성의 근본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진화한 우리는 여행하기 위해 두 다리와 복잡한 뇌, 주된 감각으로서의 시각 같은 일정한 특성을 필요로 했는데, "이 특성들과 더불어 분노나 두려움, 흥분, 호기심, 놀라움 등의 감정능력이 생겨났다. ... 이 감정은 한때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게 해주었지만 지금은 우리를 고문한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유목민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정착민은 한곳에서 땅을 일구는 것 같지만, 긴 세월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그 반대다. 유목민과 수렵-채집인들은 땅의 한 구역에 거주하면서 그 구역 안에서 자유로이 이동하는 반면, 정착민이라는 유럽인은 가장 흉포한 약탈자 무리가 되어 전 세계를 휩쓸며 모든 대륙을 침범했다.
땅을 소유한 부유한 유럽인들(성인 남성으로서 이성애자이고 기독교인인 사람)은 자신들과 반대되는 부류, 즉 가난한 사람이나 비유럽인, 여성, 동성애자, 집시, 유대인, 수렵-채집인, 광인, 아이들에게서 하나의 공통된 특징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권력의 층위(성별,계급,인종,종교,성적 편향,정신상태)에 따라 공통으로 존재하는 유목민주의에 대한 증오였다.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은 '매춘부'로 불린다. 창녀는 '거리의 여자'고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쉽게 움직이는 여자는 "헤픈" 여자다(1964년, 황야에 대한 미국의 그 유명한 법적 정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여자는 "남자들이 찾아오지만 머무르지 않는"사람이다).
여성에게는 주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동사인 '놀러 다니다'나 '놀아나다'와 같은 동사가 쓰인다. flirt(바람을 피우다, 시시덕거리다)에는 성적으로 방종한 행동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남성보다 여성에 주로 사용하는 단어라고 한다). 명사로서 이 단어는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운 사람, '경박하고 들뜬 성격의 여성'을 가리킬때 사용된다. 같은 사전에서 flighty(변덕스러운)는 '대체로 어린 여자'에 대해 사용되는 것으로 나온다. 여성은 새처럼 들떠 있다(영어에서 새, 병아리, 오리, 암탉, 이 모든 명사는 여성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flirt는 새가 오랫동안 이동의 자유를 상징해온 것처럼 날개달린 동물들에 사용된다. 새에 사용하느 flirt는 짧은 거리를 재빨리 날아오른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새의 깃털이나 부채(둘 다 전통적으로 여성 의상의 일부다)를 불쑥, 날렵하게 펄럭인다flirt. 이 모든 단어에서 여성의 야생적인 이동성은 비판의 대상이다. 폄하하는 말로 쓰이는 "누구와 눈 맞아 도망가다run off with someone" 라는 말은 남자보다는 여자에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모든 변덕스러운 여자 중 최악의 여자는 빗자루를 타고 자유롭게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밤의 방랑자, 바로 마녀였다. 여자들은 가축이나 작물을 죽였다는 이유로 마녀라는 혐의를 받았다. 이것은 정착민들이 항상 유목민들에게 씌우던 혐의와도 일치한다. <크루서블>에서 헤일 목사는 한 소녀에게 "누가 널 괴롭히니?...아마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어떤 새가 널 찾아오나 보다. ...누가 너에게 날아보라고 하든?"이라고 말한다. 나는 것, 이동의 본질적인 자유는 악마적이고 야생적wild이다(이 희곡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단어인 'be-wild-ered'는 죄를 짓고 길을 잃거나 방황하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사용됐다).
여성의 신체적 움직임은 단이 좁은 치마 속에서 '종종'걸음이 되었고, 코르셋에 의해 '억제'되었다. 여성이 아무 데도 자유롭게 갈 수 없도록 한 중국의 전족 풍습은 악명 높다. 여성의 몸 자체는 그 과정상 유목민적이다. 항상 움직이고 흘러가는 상태에 있는 여성의 몸은 집시와 같다.
여성의 대화는 '장황하다.' 여성은 '요점'을 곧장 말하지 않는다. '정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대화는 급히 여행을 다녀오고 주제에서 벗어나기 일쑤다. 우리는 순환적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자유로운 언어적 방랑은 지나치게 남성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을 격분시킨다.
(19세기에 처음 출판된) ≪Brewer숙어 및 우화 사전≫ 1978년 판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여성wild women"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등재되어 있다. 이 여성들은 "나라 전체를 상대로 도전하는 탈주자"다 (........중략...........).
떠돌이나 유랑자, 부랑자 등은 모두 유목민이라는 의미가 함축된 말로, 극빈층을 지칭하는 경멸어로 사용되었다. 뜨내기는 모욕적인 단어다. 현대 미국에서 '떠돌이'는 하찮은 취급을 받는다. 유랑자라는 단어는 초기에는 단순히 특정한 한곳에 살지않고 떠도는 사람을 지칭했다.이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 것은 게으른 한량, 쉽게 범죄자로 변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494년 영국에선 '유랑자 및 걸인법'이 통과됐는데, 이 법에 따라 유랑자와 걸인은 그들만의 영역에 체류하도록 강제됐고 만약 떠돌아다니다 잡히면 3일동안 족쇄를 차고 수치를 당해야 했다. 1547년에는 끈질기게 방랑을 포기하지 않는 자에 대한 처벌로 낙인과 노예화가 시행되었다.
과거 영국에서 시행된 빈민구제법의 목적은 빈민을 통제하고 한곳에 살도록 구속하는 것이었다. 1662년 새 의회법의 전문前文에는 "법의 몇몇 흠결로 인해 빈민들이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 이주하는 것이 제한되지 않고 있다"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유랑하는 빈민에 대한 전반적인 증오는 시인 Edmund Spenser가 1591년에 쓴 시구에도 드러난다.
악한으로 몰리는 것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통행허가증이나 유효한 보증도 없이
마구 떠돌아다닌다.
어른들은 '제멋대로인' 아이들과 '나쁜 길로 빠진' 청소년들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본다. '통제를 벗어난' 사람이나 사물은 환영받지 못한다. 실수나 위반, 방황은 도덕적 반감을 산다.
광인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동요하는', '불안정한' 사람으로 불린다. 그들의 정신적 이동성은 병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어수선하고' 그들의 사고는 '괴상하다'. 그들은 '흐트러져' 있고 '상궤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들의 정신은 '방랑'한다. 즉 '정신이 나가' 있다. 광인에 대한 대응은 그들이 자유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가두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영웅은 여행을 한다. 원주민의 조상들, 오디세우스, Beowulf, Don Quijote 들이 그 예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 여행하는 것은 어쩌면 완전한 성숙을 위해 필요한 과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사회는 그 필요를 병리적인 현상으로 변질시켰고, 여행에 대한 강박적 충동을 가진 사람들에게 '히스테리성 배회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1893년에는 프랑스에서 '신경병적 여행자' 유대인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전 세계를 떠돌 운명을 짊어진 '방랑하는 유대인'을 병자로 본것이다. 나치스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들이 나라 없이 방랑하는 민족이라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피와 땅에 뿌리를 박은 나치스는 철새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는 있었으나, 그 방랑이란 재산을 소유한 민족으로서 자신의 땅에 소풍을 나가는 정도였다. 따라서 유목민주의는 그들의 비위에 거슬렸다. 유대인 외에도 나치스에 의해 가장 많은 박해를 받은 다른 두 집단이 있는데 그들 역시 유목민적 특성이라는 똑같은 이유로 인해 증오를 받았다. 바로 집시와 성적 경계에 구속되지 않는 방랑자들인 동성애자들이었다. 동성애자들은 '상궤를 벗어나' '만유漫遊'하는 성적 유목민이다. 팬터마임에서 자신의 성별에 맞는 옷차림의 경계를 넘어 이성의 옷차림으로 변장하는 배우를 'travesti'라 불렀는데 이 단어는 후에 도덕적으로 왜곡된 의미를 가지는 'travesty(복장도착자)'가 되었다.
나치스는 50만명이나 되는 집시들을 살해했으나, 2년 이상 정착생활을 했다고 증명하는 집시들은 상대적으로 관대히 대우했다. 길들여지지 않고 자유로운 프랑스 집시들은 '무단결석자'라고도 불렸으며, 학교교육을 받은 획일적인 대다수로부터 증오를 받았다. 그들의 삶은 로마니(집시)어로 '기나긴 길'이었다. 18세기 독일에서는 집시들은 채찍질과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졌고, 그들은 야생동물처럼 사냥되고 죽임을 당했다. 1835년 라인 지방 한 지주는 사냥을 나가 '목을 베어온' 동물들의 이름을 나열했는데, 거기에는 '여자 집시와 젖먹이 아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유럽 국가에서 집시는 그저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자가 되었다. 유럽 전체에 걸쳐 집시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주의자들에 의해 맞아 죽고 있으며 빈곤 속에 살아간다. 영국의 경우, 1986년에서 1993년 사이에 집시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찾는 장소 중 67%가 폐쇄되었다. 1994년, 형사사법 및 공공질서법Criminal Justice and Public Order Act은 여행자들에게 장소를 제공할, 지방의회의 의무를 폐지함으로써 사실상 집시의 유목민 생활을 파괴했다.
1554년 영국법은 스스로를 이집트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사실 '가짜 유랑민'이므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이 '가짜 유랑민'은 오늘날 난민 수용소에 갇혀있는 '위장 난민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타블로이드 신문과 같은 현대 미디어는 난민을 표현할 때 거의 항상 '밀물과 썰물', '홍수', '흐름', '커다란 파도'와 같은 야생적이고 이동하는 자연의 속성에 빗댐으로써, 고대로부터 내려온 맹렬한 증오에 악의에 찬 새로운 목소리를 더한다.
유럽의 정착민들이 다른 땅을 침략했을 때 가장 증오한 대상은 바로 유목민들이었다. 1910년 캐나다에서 선교신부로 일하던 프랑스인 르클레르크 신부는 "방랑하고 유랑하는 삶"은 종식되어야 하고 "땅을 일구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야만인들을 정착하게 하고 우리처럼 교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1927년까지 남아프리카에서는 부시먼의 활을 가지고 다니면 법에 저촉되었고 '유랑생활'은 범죄였다('vagrant'[유랑하는]의 어원은 라틴어 vagor, 즉 '떠돌다, 자유로이 돌아다니다'에서 유래됐다).
19세기 중반 오스트레일리아의 쿠리Kooris족은 '유랑민'법에 의해 처벌받았다.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쿠리족은 자동적으로 불량배와 부랑아로 정의됐고, 새로운 불법침해법에 의해 처벌받았다.
1888년
기독교 선교사들은 선교 본부를 세운 모든 곳에서 먼저 원주민들을 억지로 정착시킨 후, 자신들의 커다란 증오의 대상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 대상에는 아마존이나 남극의 변신자shape-shifter, 전 세계의 주술사들, 심지어 영혼의 세계에 사는 유목민들까지 포함되었다. 그들의 유목민주의는 춤이나 단식, 약물 등을 통한 변신과 황홀경의 형태를 취했고, 그들의 영적 경험은 울타리 쳐진 선교본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주술사의 유목민주의는 평범함의 벽 밖에 서 있는 무아지경이었다. 절대 명령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곳에서 이 무법자들은 인간의 경솔하고 돌발적인 영혼을 자랑했다. 주술사가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에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질병을 앓는 특징이 있다. 그들의 감정 역시 유목민답게 변덕스러웠다. 그들은 음식을 거부하다가도 식탐을 보이기도 하고, 수일간 잠을 자지 않다가도 때로는 완전한 잠에 빠져 꿈을 꾼다. 정신적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들은 '방랑'할 필요를 느끼는 전형적인 유목민의 유형이다.
기성체제는 수백 년에 걸쳐 모든 형태의 유목민주의를 적대적으로 대해왔고, 이로 인해 유목민들은 모든 변화의 시기마다 설 자리를 잃었다. 사실 정착 계급의 시도는 너무나 성공적이고, 그들은 그 성공에 충분히 자족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유목민주의의 마지막 잔존물을 패키지여행의 형태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여유가 생겼고, 이동하지 않는 이동식 주택이라는 허풍의 진수를 통해 우스꽝스러운 자기모순을 보일 정도다.
이처럼 유목민의 야생적 자유의 매력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폐 속의 자유로운 호흡, 지평선을 갈망하는 눈, 끝없이 뻗은 길을 밞고 싶은 근질근징한 발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자, 이제 신발을 신어보자.
헌 부츠는 행운을 가져온다고 한다. 사실 산책가라면 알고 있는 것처럼 헌 부츠는 행운 그 자체다. 당신의 발에 맞게 접히고 부드러워지고 뒤틀어진 부츠 속에서 신발과 발은 아늑하고 편안하게 한 쌍이 된다. 부츠에는 그 나름의 역사가 있지만, 유목민들의 발에는 그보다 더 깊은 역사가 흐른다. 사막에서 사느라 점토처럼 갈라진 피부와 오랜 여행으로 마모된 발바닥, 땅 위에서 그들이 따라간 길들이 그물처럼 얽혀 새겨진 발을 통해 역사가 흐르고 있다. 땅은 사람들의 발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 발은 다시 땅에 길과 흔적을 남긴다.
제임스 조이스는 ≪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그의 발은 땅끝을 향해 떠나고픈 방랑의 열망으로 타올랐다. 떠나자! 떠나자! 그의 심장은 울부짖는 듯했다. ... 그는 혼자였다. 그는 주목받지 않았고 행복했으며 야생적인 생명의 심장부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홀로였고 젊고 고집스러웠으며 야생의 심장을 가졌고, 황량한 야생의 대기 속에서 홀로였다."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난 무엇보다도 내 표현이 너무 평범하지 않을까 두렵다. 내 일상적 경험의 좁은 한계를 충분히 멀리 뛰어넘어 방랑하지 못할까 두렵다. ... 사치스러운 방랑! 그것은 당신이 어떻게 갇혀있느냐에 달려있다. 나는 아무런 제약도 없는 곳에서 말하고 싶다. 잠에서 막 깨어나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방랑하다wander'는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을 암시하는 도교적 암호와 같다. 여기저기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장기 도보여행자들은 그 중독성을 알고 있다. 수피Sufi(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로 알라와의 합일을 중시)들에게는 '목적 없는 방랑'의 전통이 있는데, 이 목적없음은 '성스러운 표류'를 수행함으로써 심리적 정화를 얻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극도의 가난에 몰려 인생이 거의 무너지는 상황에 처한 이사벨 에버하트는 선택의 여지없이 따라야 했던 새로운 삶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방랑은 해방이고, 끝없는 길에서의 삶은 자유의 본질이다." 그녀의 도전은 "자유롭고 얽매인 것 없이 삶의 거대한 사막속에서 야영하는 유목민이 되라는" 유목민주의의 떠들썩한 종소리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나는 다시는 정착 생활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리라는 사실과 평생동안 태양에 흠뻑 젖은 어딘가를 동경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유목민주의는 우리가 가진 야생의 정신에서 보자면 최초의 불과도 같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그것을 훔쳐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불꽃처럼 호기심 많고 가볍게 사로운 곳으로 뛰어다니면서 활기차게 움직인다. 그 강렬한 충동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볕 아래에 텐트를 펄럭 휘둘러 펼쳤다가 새벽이 되면 훌쩍 또 다른 자연을 향해 떠난다. 그것이 가장 밝게 타오르는 산불 같은 삶이다.
백인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자유롭게 떠돌고 떠돌고 떠돌아다녔죠. 어니 윌리엇므는 내 여행 초반에 이렇게 말했다. 거의 노래처럼 들리던 그 말의 리듬은 그 의미를 정확히 환기시켰다.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걸음처럼 규칙적이고 끝없이 반복되는 그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말은 내 정신에 발자국을 남겼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땅에서 내쫓았지만, 어찌 보면 현대사회가 인류의 유산인 유목민주의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그러니 이는 백인들 자신이 내쫓긴 것이나 다름없다. 방랑의 부름은 결코 그 힘을 잃은 적이 없다. 방랑벽은 끝없는 길을 향해 떠나고 집시나 방랑자, 떠돌이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여전히 우리 옆에 있다. 우리는 모두 방랑객이다.
걸으라. 북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를 따라가라. 천둥의 북소리를 따르라. 태양을 좇으라. 밤하늘 저편으로 길게 기울어지는 별들을 따라가라. 번개와 툭 트인 길을 따라가라. 당신의 충동을 따르라. 당신의 부름을 따르라. 명령과 습관 외의 모든 것을 따르라. 불을 원동력으로 하는 삶 자체를 따르라. 당신의 의지가 향하는 곳으로 가라. 꼭 그래야 한다면 떠날 때, 문에 불을 지르고 포석을 그을리며 건너온 다리도 불사르라. '그 벽' 옆에 방화도구를 두고 펼쳐진 땅을 향해 뻗어있는 당신의 길을 질주하라. 감히 말하건대, 도전하라.
모든 아이들은 순회 서커스를 보기 위해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어른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커다란 천막이 있는 곳, 태양 자체가 감독이고 서커스 텐트가 온 세계이며 매일이 열정적인 무료 공연으로 넘치는 모두를 위한 곳, 당신은 입장표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것은 당신이 신발끈을 조였을 때 저절로 따라온다.
음유시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방랑가객과 연주단, 그들은 명랑하고 떠들썩하게 노래하는 유목민이다. 다시 길을 떠나는 그들을 보는 정착민들에게는 누를 수 없는 질투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교외의 시들하고 고여 있는 하수구에 푹 빠져 사는 정착민들에게 시간은 일상에 따라 굼뜨게 움직인다. 그들의 일출은 침침하고 일몰은 더 침침하다. 그곳에서 과거는 사진틀 속의 미소로 고정되어 있고 미래는 연금제도에 길들여져 있다. 이 같은 교외적인 속성은 자연 속에 발붙일 곳이 없다. 야생적인 것은 무기력과 자족감에 빠지지 않는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고무젖꼭지를 빨고 매주 거대한 플라스틱 기저귀를 쓰레기로 뿜어내며 닫힌 문 옆으로 불룩한 쓰레기 봉지가 놓여 있는, 교외 생활의 괴상한 발육부전은 자연 속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야생동물의 기민성은 교외로 갈수록 신경증적으로 커튼을 잡아 끌어내리는 것으로 타락한다. 모든 동물의 호기심은 24시간 위성중계 뉴스에 대한 탐닉으로 퇴화된다. 소심하게 순종적인 교외의 삶은 작은 주택에서 들리는 권태로운 자장가일 뿐이고, 오늘의 잠과 내일의 잠 사이에서 깜박 조는 물가 연동식 낮잠에 불과하다.
환경 속에서 활동적인 사람들은 마음이 평화롭다. 반면 수동적이고 타성적인 사람들은 우리에 갇힌 듯한 느낌에 강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그 원인, 즉 우리가 추방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알든 모르든, 우리는 탁 트인 길을 열망한다. 과거는 민첩하게 툭 털어버리고 지평선을 향해 전속력으로 그 열망의 길을 질주하기를 원한다. 바람이 당신을 채찍질할지 아니면 부드러운 태양이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져줄지 모른채, 그저 일종의 신념처럼 믿음 하나로만걷는다. 어떤 잘난 신이 당신에게 길을 알려주는 게 아니다. 그 길 자체가 당신에게 길을 안내할 것이다. 당신은 그저 부츠를 집어서 신고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반드시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발에는 메르쿠리우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상업의 신, 그리스 신화에선 헤르메스)처럼 날개가 달렸고, 영혼은 유목민의 불로 벼려졌다. 극도로 민감한 눈은 길을 놓치지 않으며 땅에 난 선을 따라가고 싶은 유혹에 저항하지 못한다. 우리는 완전히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삶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우리의 정신은 가동적이고 재빠르며 변화무쌍하다. 우리 모두의 정신에는 메르쿠리우스의 발처럼 날개가 달려 있어 신호를 받고 반응한다. 맑은 날씨였다가 소나기가 내리고, 폭풍우가 쳤다가 삼복더위가 이어지는 자연처럼 변덕스럽다. 우리는 곧 다가오는 사나운 날씨처럼 다양하게 변하고 그 비에 흠뻑 젖는다.
눈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지평선은 정신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정신의 유목민은 인간이 타고난 천성이다. 우리는 이동하고 배우고, 항상 학생의 자리에 있으며,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확실성의 피난처를 뒤로 하며 편견없이 경탄하고, 정신이 스스로 놀랄 때까지 방황하도록 놓아둔다. 정신은 자유로이 놓아두면 스스로 걷고 묻고 찾는다. 정신적 여정의 방랑자는 묻고 또 묻는다. 구하기 위해, 탐구의 모험을 떠나기 위해.
일단 길을 나서면 감각을 활짝 열어놓은 채, 태양이 떠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하루의 리듬은 불의 리듬이다. 새벽의 새벽, 아침은 새들이 부리를 부리며 만드는 그 작은 불꽃에서 시작하고, 정오의 포효하는 청소년기의 불 그리고 오후의 성숙한 불을 거쳐 저녁의 낮은 난롯가의 할아버지 불이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머니 재가 된다.
길을 나선 당신에게 시간은 항상 움직이는 방랑자로 보인다. 마구 뛰어 놀다 빈둥빈둥 꾸물거리고 나무에서 모든 잎을 벗겨버린다. 욕망에 들떠 쉴 새 없이 안절부절못하고 끝없이 방향을 트는 시간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세계의 모든 구릉을 굽이굽이 돌고 소용돌이치며 산 위로 치솟아오르고 산을 마멸시킨다.
길 위로 나서면 저절로 노래하는 재능이 생긴다. 걸으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방랑자는 산 위에서 원기 좋게 큰 목소리로 곡조를 뽑아낸다. 태양을 노래하라. 걸음을 통해 길을 노래하라. 유목민의 리듬은 태양이고, 멜로디는 송라인SONGLINE이다. 굽어지고 경사지고 꺾인 길에서 음악은 땅의 가락으로 메아리친다. 노래하는 사람은 길이 노래에 열중해 황홀감에 젖을 때까지 선율을 붙여 노래를 부른다. 그는 그 길을 노래하고 그 노래 위를 걷는다. 길과 노래와 노래하는 사람은 하나다. 자, 떠나라!
por Lago Musters o Colhué Huapi, Chubut, Argentina | 무스터 아니면 꼴우에 우아삐 호수








